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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벌어졌던 참옥한 4.3사건

by new-dream-blog 2025. 4. 2.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벌어졌던 사건을 알아보겠습니다.

제주도에서 벌어졌던 참옥한 4.3사건

드디어 1945년 8월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조선은 해방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유를 꿈꾸며 새 시대를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되었고 제주도는 미국이 통치하는 지역이 되어 미군정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 혼란 속에서도 사람들은 우익이니 좌익이니 하며 이념의 갈등이 점점 심해져 갔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렸고 제주읍에서는 북국민학교의 3.1절 행사가 오후 2시에 끝나자 군중들은 가두시위에 나서게 됩니다.

시위대가 관덕정을 거쳐 서문통으로 빠져나간 뒤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치게 됩니다.

이때 기마경찰이 다친 아이를 그냥 두고 지나가는 것을 보자 군중들은 돌을 던지며 항의를 했고 관덕정 부근에 포진에 있던 무장경찰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습니다.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희생되었고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제주 4.3 도하선이라 불리는 3.1 사건입니다.

1947년 3월 10일부터 그 사실에 사람들이 분노하게 되고 며칠 뒤 제주도 전역에서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민. 관합동총파업, 시위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는 공산반란으로 간주하고 대대적인 탄압을 하게 됩니다.

무장대뿐 아니라 민간인을 빨갱이 색출이라는 명목으로 몰아 체포되고 고문을 하며 마을 단위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이때 북촌리에서 300명 이상의 무차별 학살이 일어났으며 서귀포, 한림, 조천 등지의 수많은 주민이 집단살해를 당하고 마을들이 소각되었습니다.

그러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소속의 무장대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면서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4.3 사건의 시작입니다.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군뿐만 아니라 경찰, 서북청년단과 같은 극우 단체까지 동원했습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무차별적으로 희생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가 넘는 2만~3만 명이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중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 힘없는 임산부, 노인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주도는 오랜 시간 동안 말하지 못한 섬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이 사건에 대해 입을 열 수 없었습니다. 말을 하면 간첩, 빨갱이로 몰려 희생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족들은 멍에를 지고 살아가야 했으며, 피해자들은 국가로부터 잊힌 존재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2000년대 들어서고 진실을 찾으려는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유족들의 증언과 생존자들의 증언들로 기록되지 못하고 잊혀 갔던 사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2003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를 찾아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했으며, 2005년 마침내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2006년에 공식 진상조사 보고서가 발표되었습니다.

그리하여 2018년부터 매년 4월 3일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대한민국이 국가 차원에서 희생자들을 기리는 날이 되었습니다.

제주는 여전히 그날을 기억하며 추모식과 위령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원하신다면

제주 4.3 평화재단 공식 홈페이지로 방문해 주세요